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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9 11:17

진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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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겸칼럼] 진불암!

 
 
놀뫼신문

 

[송인겸칼럼]

진불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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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겸 사회복지법인두드림 이사장

 

전라남도 해남 두륜산 자락에 대흥사라는 큰절이 있다. 가본지도 꽤 오래되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는 잘 몰라도 대흥사 대웅전 법당 안에는 오백 나한들이 빼곡히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오백 나한들의 표정들이 엇비슷하지만 다 제각각이어서 똑같은 모습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느 한 나한을 보고 우측이든 좌측이든 자기 나이를 세면서 그 나이 수에 있는 나한을 찾아가 보면 그 나한이 현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던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누군가가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이 난다. 물론 지어낸 말일 것이다.

해남 대흥사는 조계종 22교구 본사일 정도로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사찰이면서도 우리나라에서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오래 전에 이곳에 가려면 호남철도를 타고 광주 전 역인 송정역에서 내린다. 근처의 송정터미널에서 해남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면 배가 유명한 나주를 거쳐 월출산이 있는 영암을 돌아 해남버스터미널에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삼산면에 위치한 대흥사까지 가면 거의 하루 종일 걸리던 그런 시절이 있었다.

사실 대흥사라는 절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냥 지나가다가 한두 번 기웃거려 본 것 밖에 없다. 나와 직접 인연이 있는 곳은 다른 곳에 있다. 이 대흥사의 말사로 이곳에서 산길로 거의 1킬로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두륜산 중턱에 위치한 진불암이라는 암자이다. 지금은 그곳까지 차가 올라간다고 하지만 나와 연이 닿던 이십여 년 전에는 산길로 40여분을 걸어 올라가야 했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서 예불을 드리고 남은 양초를 방에 가지고 가서 켜놓고 사용했던 그런 곳이었다. 

이렇게 공부한답시고 한두 달 절밥을 먹었던 인연이기도 하지만 암자의 터가 좋은지 지금까지도 그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척 편안해진다. 오래전에 입적하신 고성훈스님도 이 시기에 만났고 이분의 강압(?)에 의해서 얼떨결에 삼천배도 했던 몸이다. 전혀 불교에 문외한이었던 당시의 나를 지금까지도 염불을 입으로 흥얼거리게 만들었던 장본인도 바로 그분이다. 지금도 그 분의 책이 불교서적에 가면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학승으로 뛰어나신 분이었고 부처 불(佛)의 한자를 붓글씨로 써서 신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지금도 그 글씨를 액자로 만들어 집이나 식당에 걸어놓은 곳을 여러 군데 본 적도 있다. 아무튼 절의 생활이 나에게는 너무나 생소했지만 그 생소함이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소중한 인연이었고 큰 경험이었음은 분명했다. 

가끔 내 삶에 회의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내 살아온 모든 것들이 삼라만상의 룰에 맞추어져 있다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어떨 때는 내가 어떻게 할 수없는 불가항력적인 흐름에 끌려가는 느낌을 맛보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것이 그 이유를 찾으려고 노력을 한다. 모든 사태에 대해 체념하고 순응하기 보다는 그 이유가 뭘까? 라는 의문 부호에 더 호기를 부리며 연구자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습성이다.

나에게는 발달장애를 겪고 있는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나에게 왔을 때 대체 이유와 원인이 무엇인지 무척 궁금했다. 또한 장애에 대한 편견으로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사회적 통념을 받아드리는 것이 서툴러서 마음에 상처를 안고 살았다. 이것이 내 업보라면 나에게 주어진 모든 고통을 감수하며 남은 생을 체념하면서 살아야겠지만 당사자인 우리 아들의 삶은 대체 어떻게 해줘야 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게 해야 할지는 도무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 해답의 일환으로 불교에서 기독교로 전향하여 교회를 다닌 지가 십년은 되는 것 같다. 한마디로 개종을 했다. 

불교를 나 혼자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좋다. 그러나 우리 아들과 함께 보면 그것에 대한 생각은 달라진다. 우리 아들을 위해서 해줄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종교적 개종은 심리적인 것보다 실천적 가치에서 있다고 봤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우리 아들을 나에게 보낸 것은 그만큼 이유가 있다고 봤다. 우리 아들과 같은 장애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함께 힘써 달라는 하나님의 사명이 나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도 많이 편해졌다. 목적이 생겨나니 삶의 의욕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도 받았다.

그러나 장애에 관련된 일들을 하면서 마음의 상처를 받을 때가 사실상 많다. 매사에 부딪치는 일들이 음해에 가깝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실망이 크지만 이 모든 것도 내가 짊어지고 가는 일이라 생각이 들어 감수하며 살지만 그래도 인간인지라 마음속에 있는 화가 쉽게 풀어지지 않는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힘들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꼭 손발이 힘든 그런 일들을 하며 산다. 주위에서는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누구는 안타까워하지만 이런 일이 내게는 너무나 좋다. 왜냐하면 일하는 전 과정을 내가 컨트롤 할 수도 있고  새로운 것들이 내 노력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보람도 느낀다. 그런데 이런 인생의 과정이 나에게 정해져 있던 삶은 아니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진불암이다.

진불암 중앙에 응진전이 있고 그 곳에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이곳에도 나한들이 부처님 좌우로 있는데 그 나한들을 자세히 보면 이상한 차이점을 알 수가 있다. 부처님 왼쪽에 있는 나한들은 모습들이 근엄하면서도 인자한 모습들이다. 즉 우리나라에서 만든 나한상이고 반면에 우측에 있는 나한들은 그 모습이나 분위기가 낯설고 물 건너온 느낌이 든다.       

그래서 그때 당시 스님들에게 물어보았는데 오른쪽 나한들은 중국에서 큰 홍수가 나서 우리나라 서해를 거쳐 떠내려 온 것이라고 했다. 강진에 살던 한 어부가 그물로 건져 진불암에 안치했다고 들었다. 이 말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물에 떠내려 온 나한 중에 내가 오래도록 의식하고 떠올렸던 한 나한이 있다. 얼굴이 근엄하기보다는 오만 인상을 쓰고 양손에 긴 창과 망치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나한이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삶처럼 나도 양손에 연장을 사용하여 돈을 벌며 산다. 그 나한이 꼭 나를 표현한 것 같아서 오래 전부터 무의식적으로 기억에 자주 떠오르고 했다. 그 나한을 아주 오래도록 기억하며 살아왔다. 모두가 근엄하고 인자한 모습을 선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결국 실천적 가치를 존중하며 살아서 그런지 그런 나한에 의식이 갔다.

가까운 시일에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지만 지금 가보면 절은 그대로지만 내가 알던 스님들은 모두가 사라져 버렸을 테니 쉽게 발길이 그곳을 향하지 못한다. 결국 아무리 터가 좋아 마음이 편안한 곳이라고 하더라도 결국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치유가 된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없으니 그냥 그 나한을 생각하며 내 삶을 이렇게 순응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 부호가 생긴다. 인생은 결국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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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개돌이 2021.08.09 11:19
    오래 전에 썼던 글인데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곳!
    인터넷에서 사진을 찾아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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